밀린다팡하
대왕이여 상처가 났을때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는 것은 상처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 밀린다팡하 - 1 밀린다팡하 차례 2 밀린다팡하 소개 3 명칭과 내용 4 윤회의 주체-1 5 윤회의 주체-2 6 출가의 목적-1 7 출가의 목적-2 8 육신이 중요한 이유 9 시간의 끝-1 10 시간의 끝-2 11 해탈한 사람의 시간 12 알고 짓는 죄-1 13 알고 짓는 죄-2 14 고통을 맞을 준비-1 15 고통을 맞을 준비-2 16 불공을 하는 이유-1 17 불공을 하는 이유-2 18 무심과 자비-1 19 무심과 자비-2 20 일념 속의 극락 21 진리와 교단 |
밀린다팡하(3) 명칭과 내용
먼저 ‘나’ 라는명칭과 실체의 내용에 대한 물음을 생각 해 보자. 불교에서는 ‘무아(無我)’ 라고 한다. ‘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갖 행동을 다한다. 불교의 무아사상과 ‘나’라는 명칭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밀린다 왕이 묻고 나가세나 비구가 대답한다.
“존자는 어떻게 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또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나가세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호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호칭에는 영원불멸의 인격적인 개체는 없습니다.”
비구는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 이름에 영원불멸의 실체가 포함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자 왕은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한다.
“만일 인격적 개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불도를 닦기 위해 힘쓰는 자는 누구이며 수도에 의해 열반에 이르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속적인 욕망으로 인해 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자는 누구이며 무간지옥에 떨어질 반역죄를 짓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런 논법이라면 누가 그대를 죽이더라도 거기에 살생의 죄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대를 나가세나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그대의 머리카락입니까? 팔, 다리, 몸체, 입술, 창자 또는 늑막입니까? 아니면 이들 전부가 나가세나입니까?”
왕의 생각에는 ‘나’라는 이름이 있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 이름의 개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의 한 부분 또는 전체가 나가세나가 되느냐고 묻는다. 비구는 그 어느 것도 나가세나가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자 왕은 정신적인 작용들이 나가세나냐고 묻는다. 비구는 아니라고 한다. 왕은 정신과 육체의 모든 요소를 통합한 것이 나가세나냐고 다시 묻는다. 비구는 또 부정한다. 그러자 왕은 말한다.
“나는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었으나 나가세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나가세나란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앞에 있는 나가세나는 누구입니까?”
비구는 왕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왕에게 반문한다.
“대왕은 여기에 오실 때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수레인가를 제게 설명해 주십시오. 바퀴가 수레입니까? 멍에 . 밧줄 . 바퀴살 . 채찍이 수레입니까?”
왕은 이것들 모두가 수레가 아니라고 답했다. 비구가 다시 왕을 몰아부친다.
“그렇다면, 이 수레의 부품들 각각과 부품들 전체를 합한 것을 제외하고 따로 수레라는 것이 있습니까?”
왕은 계속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자 비구가 말한다.
“그렇다면 대왕이 타고 왔다는 수레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대왕은 수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짓 말을 한 셈이 됩니다. 전 인도에서 제일가는 대왕께서 무엇이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십니까?”
그러자 왕은 비구에게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레는 이 모든 것 즉 수레채, 굴대, 바퀴, 차체, 차틀, 밧줄, 멍에, 바퀴살, 채찍 따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나타내기 위해 수레라는 호칭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비구가 왕의 수레에 대한 설명을 받아, ‘나’라는 이름이 있으면서도 ‘나’라는 실체가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렇습니다. 대왕께서는 수레라는 이름을 바로 파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대왕이 나에게 물은 것, 인체의 구성부분과 색수상행식의 오온 . 즉 다섯 가지 물질적 . 정신적 구성요소를 나타내기 위하여 나가세나라는 명칭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여러 부분들이 모여 수레라는 말이 생기듯이 오온이 존재할 때 중생이라는 이름이 생깁니다.
수레의 부품들을 떼어서 생각하거나 수레의 부품들 전체를 통합해서 수레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부품들이 전체적으로 연결되어서 물건을 나르는 역할을 할 때, 그 기능을 수레라는 이름으로 부르듯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와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정신적인 요소들을 따로 떼내서 생각하거나 전체를 통합해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요소들이 연결되어 사람으로서 역할을 할 때, 그 기능을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이름과 내용에 대한 질문과 응답은 불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질문 중의 하나이다. 불교에 있어서 인과응보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나’가 없다고 한다. 인과응보를 말하려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 인과응보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 짓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없는 인과응보는 무의미하다. 아무나 업을 짓고 아무나 그 과보를 받는다면 그것은 인과응보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주체를 세우면 그것은 무아사상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늘의 대화에 의하면 인과응보의 주체가 어떤 고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업을 짓고 받는 기능을 임시적으로 이름붙인 것일 뿐이요, 그 이름에 실체적인 고정물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과응보의 업사상과 나라는 고정적 실체가 없다는 무아사상과는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회사상과 무아사상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될 수 있다. 윤회의 주체인 나를 임시적으로 이름붙이는 것으로 생각하면 무아와 배치될 것이 없다. ‘나’라는 개념과 공사상도 마찬가지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임시적으로 붙인 이름일진대 그 내용이 공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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