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람"-자양복지관 행사
좌절과 시련이 있을 때마다 현재의 삶이 그래도 과거 보다 낫다라고
생각을 바꿔 보라(인식의 전환)
1차결집: 입멸 3개월 후 마하가섭 교리와 계율의 성립이 필요,500명
-율,경(아난다)을 합송
2차결집: 야사비구- 바이살리 보시에 관한 견해 차이가 생김
진보 보수의 분열이 생김
3차 결집
불멸후 330년 경 1000명의 비구가 모여 결집
아쇼카왕시대: 인도 전역을 통일-화합 . 마우리아왕조를 엶.
아쇼카의 동생 마인다가 주도 경,율,논 불교교단의 분열을 막기 위함
불교-외국,인도, 스리랑카,헬레니즘 문화권까지 확장
최초로 기록된 팔리어 경전(스리랑카)
* 어떤 논쟁?
* 왜 결집을 해야 했는가?
* 왜 20개가 넘는 부파가 생겼나?
* 쟁점은 무엇이며 배경은 무엇인가?-붓다의 깨달음-인간관 우주관 세계관
불교적 인간관: 연기(상호 의존적 존재)-오온의 회합(색수상행식)-무상,고,무아
무아-당시 브라만 사상과 대치(아트만)
불교적 사상에 논리적 해석의 다분화, 다양화
→인식,습관에 의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고의 틀이 생김,사변(삿된 논리)
→제자들의 혼란,갈등
→논쟁" 이 세계는 항상 영원한가, 무상? 존재?..."
독화살의 비유
부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말룽캬라는 존자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라고 질문을 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겠소. 성은 무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 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되었는지 대로 되었는지를 알아야 겠소. 또 화살 깃이 매의 털로 되었는지 독수리 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노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캬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 중아함 전유경
상좌부내 대대적 교단정비說 우세
초기교단은 근본분열이 발생한 뒤 오래지 않아 18개 부파로 분화되며, 대승불교가 등장해 불교계 주류로 자리 잡기까지 지속적으로 분파한다. 제3차 결집은 이러한 교단사의 흐름 속에서 근본분열이 있은 다음 대략 100여년을 경과한 뒤 이뤄진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제3차 결집으로 알려진 ‘파탈리푸트라의 결집’에 관한 자료들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북전에서는 〈팔건도론〉 〈발지론〉 〈십팔부론〉 〈부집이론〉 〈대비바사론〉 〈이부종륜론〉 〈대당서역기〉 등에 의해 대천의 오사설을 중심으로 하는 제3차 결집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제2차 결집과 중첩되기도 한다. 이토록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후대에 발생한 부파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자신들의 전등사(傳燈史)에 삽입했기 때문이다. 유부의 기록서인 〈파사론〉 등에 의하면 대천이 오사를 주장해 근본분열을 일으킨 사람이라는 설과 대중부 안의 제다산에 살면서 오사를 주장하여 제다산부를 창시한 사람이란 설이 있다. 제다산부를 세운 대천은 불멸후 200년 경의 인물로 본다. 근본분열을 일으켰다는 대천은 가공인물로 보며, 제다산부의 대천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대천오사가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제3차 결집을 일으킬 정도의 중요한 사건으로 보기는 힘들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남전에서 말하는 제3차 결집은 북전의 주장과 다르다. 〈디파왐사〉 〈마하왐사〉 〈선견율비바사〉 〈마하보디왐사〉 등 스리랑카의 전승에 의하면 아쇼카왕 시대에 파탈리푸트라의 상가에 싸움이 일어났다. 원인은 아소카대왕이 교단에 귀의하고, 교단이 풍요로워지자 수많은 외도들이 출가한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 파탈리푸트라(현재의 파트나)에 거주하는 출가자는 5만여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따라서 통제되지 않았고, 스님들 사이에 다툼도 끊이지 않았다. 이를 정리하기 위해 아호강가산에 살고 있던 목갈리풋타 스님을 초빙했다.
목갈리풋타는 1000명의 스님들을 모아 결집을 행하고 이단자들을 환속시켰는데, 분별설을 받아들이는 지 여부를 기준으로 출가자들을 정화시켰다. 물론 표준설을 제시하기 위해 〈논사〉를 편집했다. 분별설이란 모든 것에 대해 일방적으로 단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반드시 다툼이 수반되고,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별해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분별설의 입장인 셈. 최근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상의 절대주의화, 논리의 절대주의화를 배격하고 상대주의적인 가치를 중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잠전의 이 전승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논사〉의 성립이 부파불교의 성립 이후, 대략 기원전 2세기 후반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通說)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소카대왕 보다 100년 이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제3차 결집으로 알려진 파탈리푸트라의 결집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교단사의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중요한 사건이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학자들은 제3차 결집이 없었다고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거종단적 규모의 사건은 아니라고 파악한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상좌부 안에서 추진된 교단정비작업으로 본다. 인도 전체 승단의 행사로 제3차 결집이 진행됐다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는 것. 그럼에도 교단이 정체되고 긴장감이 사라졌을 때, 결집이란 승려대회를 통해 교단이 변화와 긴장감을 회복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차차석/ 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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